박성민 안전행전부 서기관

2014. 2. 3. 23:45조문식이 만난 사람

성장의 기억은 한 사람의 인생이다. 누군가에게 슬픈 기억은 타인에게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하고, 성장의 거름 역할도 한다.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 직업이 아닌 삶의 목표이자 희망이 된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않을까. 안전행정부에서 근무하는 박성민(37) 서기관이 전한 성장의 기억은 독자들에게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계기도 되겠다.

 

3월 초, 4월호 <피플파워> 인터뷰를 위해 국회에서 만난 박 서기관은 경남 창녕군 장마면에서 태어났고, 돌이 지나서 부모님과 마산으로 이동했다. 그는 고향을 소개하며 “완전히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저희 아버지가 7남매 장손이고, 저도 장남입니다. 누나와 저 둘이지요. 병원도 없어 시골집 작은 방에서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났어요. 시골스러운 모습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서기관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많이 이야기했다. 1970~1980년대의 도시화로 농촌사회를 떠나는 분위기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덧붙였다.

 

그는 “시골에서 도시로 나오다 보니까 유복한 삶은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공장에 다니셨는데 1980년대 초반에 아버지께서 작업복에 기름때 묻어 퇴근하시는 모습, 2교대 하고 오시면서 간식으로 준 빵과 우유를 자식들 먹으라고 고스란히 가져 오신 모습 등이 떠오르네요”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머니는 마산 어시장에서 생선장사도 하셨어요. 길거리 순대를 먹으면서 바닷바람 맞던 기억, 부모님 퇴근 시간 때 육교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습. 그러면서 다른 공장 노동자들이 퇴근하던 모습 등이 활기차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현재는 가족들이 떨어져 살다 보니까 그 때가 그립네요”라며 웃음을 보였다.

 

박 서기관은 기억 속의 경남 모습에 대해 “마산에 수출자유지역, 창원 국가산업공단이 들어섰을 때 그때가 도시화가 진행될 때고, 탈농촌화 할 때지요. 1970년대 중·후반이었네요. 저희 부모님도 농촌을 나와서 산업역군으로 일했어요. 장남이다 보니까 주말이나 명절에는 고향에 가고, 버스로 먼지 날리는 길을 지나 시골에 가던 기억과 방학을 시골에서 보낸 기억들이 있어요”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어떻게 보면 부모님께서는 힘드셨겠지만, 저에게는 행복한 기억이었습니다. 창원공단의 최초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 지역 도시의 성장과정을 학창시절 목격하며 자란 것이 기억에 남지요”라며 고향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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