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가 성 문제 앞 ‘사죄’해야 하는 이유…미투 운동 보며 적는 학창시절 ‘선생’들 이야기

2018. 3. 10. 14:00이슈

#1. 요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보면서 가끔 친구들과 한 잔 나누면 꺼내놓았던 이야기를 짧게 적어본다. 나는 국민학교(요즘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부반장을 했다. 당시 반장선거에는 나와 함께 여자인 친구가 출마했는데, 투표에서는 내가 앞섰다. 나는 그 선거에서 반 속 여자인 친구들의 압도적 지지로 1위를 했다.


하지만 당시 남자 선생 S는 “과반을 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며 재투표를 지시했다. 2차 투표에서는 함께 출마했던 여자인 친구 아이가 간발의 차이로 나를 앞섰다. 그래서 나는 부반장이 됐다. 집에 돌아와 그날의 선거 이야기를 했더니 부모님은 의아해하셨다. 부반장은 명찰을 만들어 옷에 달고 다녔다. 나는 별다른 비판은 하지 않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학교는 그저 생활하는 의무적인 공간이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의무인 한국의 초등학교 교육 환경 속에서 당시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보다 성적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은 수학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산수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경시반 등에 들어가야 했고, 그런 것이 부모들 사이에서 경쟁이 됐다.


#2. 내가 부반장이 되고 5학년 시절 여자인 반 친구들은 선생인 S에게 종종 불려갔다. 내가 적확하게 본 사례는 몇 건이니 ‘항상’이라 적지 않고 ‘종종’이라 적는다. K라는 아이는 쉬는 시간에 선생 S에게 차(TEA, 녹차 등으로 기억)를 가져가는 ‘의무’를 행해야 했다. 또 선생 S의 무릎에 앉아 ‘귀여움’을 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나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했다.


선생 S는 학교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운동선수 출신인 그는 반 전체에 자주 얼차려 식 처벌을 내렸다. 10살을 갓 넘긴 아이들 전원이 복도로 나가 창문가에 다리를 올리는 식이었다. 팔굽혀펴기를 하며 다리를 복도의 창 난간에 올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동시에 나타났다.


처벌을 받을 때는 그 상태에서 일부 아이들이 엉덩이를 맞기도 했다. 선생 S는 그렇게 반의 왕 자리를 지켰다. 우리 반 옆의 좌우 양쪽 반 선생들은 이를 보고, 또 이 같은 일을 알고도 묵인했다. 교육자라 불리지만, 봉급 받는 쓰레기들이라 적는다. 작은 지역사회 속 ‘관계’도 한몫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는 선생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3. 여름이 지난 시점? 여자인 친구 K는 선생 S에게 따귀를 맞았다. 반 아이들 전체가 보는 앞에서였다. 차(TEA)를 타가고, 무릎에 앉아야했던 그 아이. 여자인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많이, 또 자주 선생 S의 무릎에 앉아야  했던 그 아이는 ‘싫어요’라고 했다는 이유로 선생 S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생 S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는 왕이었으니까.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했다. 나 외에 다른 친구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 S는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갔다. 이후 6학년에 올라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하필이면 선생 S가 그 지역으로 전출 간 사실을 알았다. 선생 S는 학교가 숙소로 잡은 곳으로 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숙소로 들어갔다.


혹여나 피해를 본 K에게도 그 선생이 갔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선생들은 이런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랬다. 선생들 속에도 나름의 카르텔이 있겠고, 아이들의 말은 그저 어른들의 말에 미치지 못하는 미숙한 언어일 뿐이었다. 이후로는 반장선거 따위는 나가지 않았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4. 중학교는 선택해 가지 못했다. 시험으로 갔으면 어디든 원하는 곳을 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추첨으로 정해진 학교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학교였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학교여서 여기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종교적 의미는 아니라는 의미다. 1학년 때는 3월 첫 시험을 치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이유는?


담임선생은 반에서 1~10등인 아이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종아리를 때렸다. “너네만 공부하지 말고 친구들도 공부하게 하라”는 이유를 들며 때렸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또 하나. 남학생들이 있는 중학교였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는 재단이 같은 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속에서 선생들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등이야 만연했다.


중학교는 그렇게 싫었다. 다행히 비평준화 지역이라 고등학교는 시험을 쳐 국립에 갔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 고등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나름의 방향이 있었다. 대학보다 ‘출신 고등학교’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지역. 이 학교로 가자 부모님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선생들은 그나마 중학교와 달라 나도 기뻤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기자로 일하고 있다.